부부기사 이야기/ 루이-장주주의 반상 순애보
이 칼럼은 2003년 발표했던 글입니다.

 

사진제공/마음산책

스포츠 경기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바둑승부에서는 형제나 자매, 부자, 부녀, 부부 등 가족기사끼리 마주앉아 혈전을 벌이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주최측에서 의도적으로 조(組) 편성을 달리 하기 때문에 결승에 오르기 전까지는 같은 혈육끼리 동족상잔(?)을 벌이는 사태는 거의 없다.

이렇게 인위적으로 갈라놓는 데도 바득바득 맨꼭대기까지 치고 올라가 동족상잔의 비극을 벌인다면, 그것이야 말릴 재간 없는 일 아닌가.

루이-장 주주 부부의 반상 부부싸움(?)도 이런 상황이다. 이기고 올라가는 데야 어쩔 도리 없다.

2002년 12월말, 제4기 맥심커피배 입신연승최강전 결승3번기가 세계바둑사상 초유의 부부대결로 결정되었을 때 루이-장 주주 내외에게 소감을 물었다. 둘 다 멋쩍게 픽 웃더니 우리말이 훨씬 능숙한 아내 루이 나이웨이(芮乃偉) 9단이 수줍은 목소리로 답한다.

"우승은 양보 없어요. 그러나 상금은 나눠가질래요."

웃을 때, 석류 알갱이가 비져나오듯, 입술에 가리었던 잇몸이 오롯이 드러나 더 순진해 보이는 아줌마다. 자신은 불쑥불쑥 드러나는 잇몸을 콤플렉스로 여길지 모르나 자기 속엣것을 죄다 드러내 보여주며 웃는 웃음. 이러한 웃음은 소리 없기에 그 태(態)가 양껏 눈부시다.

세계 최초로 벌어진 반상 부부 결승전. 2003년 1월 12일 동서식품 부평공장 기술연구소에서 벌어진 4기 맥심배 결승2국. 남편인 장주주 9단이 이겨 2-0으로 우승했다.


남편이 셀까, 아내가 셀까.

한 지붕 아래서 한 이부자리에서 자고 일어나 한솥밥을 먹고 승패를 가려야 하는 승부사의 운명. 이야말로 영화의 가상 상황이 아닌 실제상황-'적과의 동침'이 아닌가.

결혼 전 중국에서 활동할 때와 미국에서 바둑 망명생활을 하면서 두 사람이 벌인 대국 수에 대해서는 정확한 통계가 없다. 남편 장 주주(江鑄久) 9단의 기억에 따르면 중국에서 아마추어시절 10번 정도 공식대국을 가졌는데 7:3 정도로 자신의 승률이 좋았다고 한다.

한국에 온 뒤로 연습바둑은 한 판도 두지 않았단다. 서로의 스타일을 손금 보듯 너무나 잘 알기에 재미가 없기 때문이란다. 다만 미국에서는 종종 두었다고 한다. 바둑을 둘 상대가 너무 없었던 것이다.

이 부부의 우승다툼이 맥심배가 처음은 아니다. 한국에 정착하기 전 미국에서 '북미 마스터즈 토너먼트' 결승에서만 두 번 마주친 바 있다고. 말하자면 프로의 자격으로 벌인 공식대국은 바둑 망명지인 미국에서 가졌던 셈인데 두 번 모두 남편이 이겼다.

그렇지만 아무리 프로의 신분으로 치른 대회이긴 해도 미국의 프로기전은 한중일의 기전에 비하면 세미프로급 수준. 아무래도 메이저급 공식기록으로 인정하기엔 무리가 있다. 이번 맥심배 결승 앞에 '세계 최초의 부부기사 간 결승'이란 타이틀을 붙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하여간 7:3 정도로 승률이 좋았다는 남편의 장담이 허풍이 아니었던지 이 희대의 반상 부부싸움은 남편 장 주주의 2:0 승리로 끝났다. 공개적으로 아내를 혼내주는 걸 보면 적어도 공처가는 아닌 듯싶다. 아니면 한국에 온 뒤 아직 이렇다할 성적을 못내고 있는 남편의 기를 살려주고자 아내가 적당히 져주었거나…. ^^

"남편이 우승해 더 기쁘다. 남편이라 그런지 다른 기사와 두는 대국에 비해 부담감은 적었다."

"승부엔 양보가 없었지만 생활비는 공동관리하므로 우승상금은 사이좋게 나눠서 쓸 예정이다."

루이 9단의 국후소감이 더 수상쩍지 않은가.

하긴 가족끼리의 대결은 솔직히 말해 '짱' 재미없다. 자고로 승부란 어느 정도 상대에 대한 적개심이 불타야 볼만한 것인데 그런 것이 있을 리 없으니 김빠진 사이다 짝 나지 않길 바라는 관전객들이 오히려 요상한 사람들 아니겠는가.

2000년 SK가스배 신예프로10걸전 결승에서 형제대결을 벌인 이상훈-이세돌의 싸움에서도 우리는 김빠진 사이다를 마신 적이 있다. 아무리 '이기는 것이 상대에 대한 예의'임을 내세우는 비정한 승부세계라고는 하나 아직은 '형님 먼저, 아우 먼저'가 미덕인 우리네 사고방식을 완전 지배하진 못한다.

이기면 미안하고 져도 그만인 승부라면 길게 끌 이유가 없다. 뚝딱뚝딱, 승부는 매번 점심무렵 끝났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다고 가족 간의 대국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란 얘기가 결코, 절대 아니다. 쌍방 승부욕이 떨어지다 보니 그만큼 박진감이 덜하다는 얘기를 하고 싶을 뿐이다.

어쨌든 이상훈-이세돌 형제대결에서 형이 이겨 '형만한 아우 없다'는 속담을 입증했듯 장 주주-루이 부부대결 역시 막판까지 가는 치열한 접전을 기대했지만 가장인 남편의 싱거운 영봉승으로 끝났다. 자고로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했거늘…. ^^


2003년 월간바둑 2월호, 박수동 만평



마녀라고 말하지 마세요?

'반상의 마녀(魔女)' '철녀(鐵女)' '아마조네스의 여전사' 소리를 듣는 아줌마. 그는 이 가운데 '마녀'란 별명을 무척 듣기 싫어한다.

그러나 별명이란 자신이 싫고 좋음에 따라 불리는 게 아니다. 어디까지나 팬들이 받은 인상에 따라 지어지는 것이니 어쩌랴. 조훈현 9단이 '바둑황제'란 별명을 갖기 전에 그다지 탐탁지 않게 여겼던 '제비'란 별명으로 불렸던 것처럼 팬들은 이 아줌마를 요술 빗자루를 타고 반상을 휘젓는 바둑마녀로 연상하는 것을….

사실 루이 9단의 바둑을 들여다보면 마녀, 철녀 소리가 나올 법하다. '모 아니면 도' 식의 싸움바둑. 앞뒤 잴 것 없이 칼을 뽑고는 일직선으로 찔러가는 공격법. 장점이자 단점이다. 오죽했으면 목진석 9단이 이렇게 말을 했을까.

"루이 아줌마는 누구에게도 이길 수 있지만, 한편 누구에게도 질 수 있는 스타일이다."

실제로도 루이 9단은 한국에 발을 딛자마자 '부동의 투톱' 이창호-조훈현 사제를 연파하며 단숨에 국수(國手)에 올라 기염을 토했다. 세계바둑사상 여류기사로서는 처음으로 남녀 모두에게 오픈된 타이틀전에서 우승하는 괴력을 보인 것이다.

난다뛴다 하는 남자기사들을 다 때려눕히고 여자가 우승한 사실에 얼마나 당혹했으면 원로 조남철 9단이 후배 남자기사들에게 "가위를 선물해야겠다"는 농담을 다 건넸을까. 당시 영부인 이희호 여사가 직접 축전을 보낼 정도로 바둑사를 넘어 여성사에 길이 기록될 만한 족적이었다.

그러나 이 아마조네스의 여전사는 그 뒤 이창호도 조훈현도 아닌 별로 이름 없는 저단 기사들에게 곧잘 발목을 잡히더니 슬럼프에 빠져들고 말았다.

기풍이 주는 반상(盤上)의 이미지는 강인한 '마녀' '철녀'일지 모르나 바둑을 떠나 반외(盤外)에서 받는 루이 9단의 이미지는 '백자(白磁)처럼 순백하고 겸손한 순딩이 아줌마'다.

'부부란 함께 한 길을 걷는 사이가 아니라 한 곳을 나란히 바라보는 사이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풍월이다. 남녀의 역할, 길은 틀려도 언제나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살 수 있는 관계. 이야말로 평등하고 서로 존중하는 이상적인 부부상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바둑이라는 같은 길을 걸으며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사는 루이 9단 부부야말로 행복하고 이상적인 커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가? 그렇다. 그러나 발효 없는 숙성이 어디 있으며 아픔 없는 결실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 사랑은 극적(劇的)이었기에 애절하고 뜨거웠노라.

루이 9단은 1999년 4월 한국바둑계에 데뷔 첫해부터 이창호-조훈현 사제를 연파하며 한국 최고의 전통을 자랑하는 국수 타이틀을 거머쥐어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일러스트/동아일보)

너는 나의 운명, 소설 같은 만남

루이(芮乃偉)가 장 주주(江鑄久)를 처음 본 건 1979년 봄 중국 전국바둑대회에서였다. 그리고 이듬해 10월 국가대표팀에 발탁되면서 고향 상하이에서 베이징으로 상경했고, 비로소 자주 대면하는 사이가 된다. 당시 장 주주는 제1회 중일 슈퍼대항전에서 5연승을 거둔 '항일 영웅'으로 떠오른 때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국가대표팀의 동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다 1987년 중국 샨사(三峽)에서 열린 중일바둑대회 기간 중 루이가 중국바둑 지도부가 내린 규율을 어겼다 하여 징계를 받는 이른 바 '샨사 사건'이 일어났고, 장 주주가 루이에게 치명적인 처결을 내린 지도부의 처사에 항의하고 나서면서 두 사람은 결정적으로 가까워지게 된다.

샨사 사건에 대해 조금 설명할 필요가 있다. 1987년 중일 바둑대항전은 배를 타고 장강(長江)의 삼협(三峽)을 따라 내려가면서 바둑을 두었는데 승선하기 직전 지도부에서 "여자기사들은 일본의 남자기사들의 방에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명령을 내렸다.

남자기사들은 되는데 여자기사들은 안된다? 풍기문란을 걱정하는 것인가? 아니면 자국 여자기사들을 부도덕하게 보는 것인가? 루이를 비롯한 여자기사들은 모욕감을 느꼈지만 그래도 규율은 규율인지라 명령에 순종했다.

그러다 폐막을 하루 앞둔 날, 요다 노리모토(依田紀基) 9단이 루이와 지금은 창 하오(常昊) 9단의 아내가 된 장 쉔(張璇)에게 속기대국을 제안했다. 지도부의 명령이 떠오르긴 했으나 '방이 아닌 복도에서 둔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보았고 그래서 요다 9단에게 복도에서 대국하자고 말했다. 

그랬더니 요다 9단은 "이렇게 어두운 복도에서 어떻게 바둑을 두느냐?"고 반문했고 결국은 분위기에 휩쓸려 요다 9단의 방에서 바둑을 두게 됐다. 물론 방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였고 건넌방에는 가토 9단과 장 주주가 있었다. 곧 이들도 건너와 합류하면서 시끌벅적한 수담(手談) 파티가 벌어졌다.

루이는 다음날 최종 대항전에서 이겼다. 그러나 중국팀은 종합성적에서 일본에 패했고 자연 분위기도 가라앉았다. 책임론이 제기됐고 패인은 '선수들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데로 모아졌다. 이런 흐름은 필연적으로 규율을 어기고 일본 남자기사 방을 출입한 루이와 장 쉔에 대한 책망으로 이어졌다.

지도부의 호된 비판과 반성문 강요가 이어졌다. 일부 기전에 대해 참가자격을 박탈당하는 중징계를 당한 것까지는 참을 만했는데 "품행이 방정하지 못하다"는 평가에 대해서만큼은 도저히 참기 어려웠다. 보수적인 성향의 중국인들에게, 그것도 미혼인 처녀들에게 이러한 평가는 마치 주홍글씨처럼 치명적인 수치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세계 여자바둑 정상에 선 기사가 바로 이 두 사람, 루이와 장 쉔이었다. 흥창배에서도 두 여걸은 여러번 우승을 다퉜으며 제1회 정관장배에서도 결승3번기를 벌였다.)

이때 장 주주가 지도부의 처결에 분연히 항의하고 일어섰다. 다들 지도부의 눈치만 살피며 쉬쉬하고 있을 때 당당하게 루이를 위로해준 유일한 남자가 장 주주였던 것이다.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루이였지만 당분간 9단 승단에 진력했고, 이듬해 여류기사로는 세계 첫 9단에 오른 뒤 1989년 미련 없이 국가대표팀을 사퇴하고 상하이로 내려갔다.

중국기사에게 차지하는 '국가대표팀'의 비중은 실로 막강하다. 국가대표팀 기사냐 아니냐는 곧 바둑으로 부귀영화를 얻을 수 있는 급행열차 티켓을 쥐고 있느냐 없느냐로 대체해 말할 수 있을 만큼 모든 기사가 혼신을 다해 들어가고자 하는 자리다. 중국에서 국가대표팀에 선발된다는 것은 엄청난 부와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국제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과 기회를 갖는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건대, 중국바둑계 지도부가 갖는 권위와 권력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거늘 루이가 15년 전에 국가대표팀 자격을 스스로 내던졌다는 것은 기사생명을 포기할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내릴 수 없는 결단이다. 지도부의 처사에 반발해 국가대표팀에서 사퇴한 루이는 물론 그 부당성에 대해 항의한 장 주주도 지도부의 눈밖에 난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 이때부터 두 사람에게 혹독한 시련과 방랑의 시기가 시작된다.

먼저 장 주주가 중국을 떴다. 1990년 8월 장 주주는 미국으로 날아갔는데, 그의 미국행에 대해 아직도 '천안문 사태'에 연루된 정치적 망명으로 알고 있는 한국팬들이 많다. 천안문광장 민주화 시위 때 앞줄에서 피켓을 들고 있던 장 주주가 정부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밀항했고, 그때 밀항을 도운 친구는 당국에 검거돼 처형됐다는 소문이 한국에서는 한동안 정설로 떠돌아다녔던 것이다.

본인은 이를 극구 부인하며 아직도 이러한 보도가 나올 때마다 수정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따로 자세히 언급하겠다.

연인 장 주주조차 떠난 중국 땅에서 더는 걸 희망이 없게 된 루이 역시 일본 유학을 결심하고 어렵게 어렵게 수속을 밟아 한달 뒤 상하이를 떴다.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주고받던 사랑은 미국과 일본에서 주고받는 애틋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동맥이 아리도록 누군가가 보고 싶을 때, 한달음에 달려가 만날 수 없는 처지라 그저 허연 달빛 아래에서 맥놓고 울 수밖에 없을 때의 그 심정을 아시는지.

'반상의 견우와 직녀' '반상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반상의 로미오와 줄리엣

장 주주 9단이 중국을 떠나게 된 경위에 대해 여러가지 억측이 있는 만큼 이부터 언급하는 게 좋겠다.

항간에는 그가 1989년 중국의 자유와 민주를 요구하는 천안문(天安門) 사태 때 선두에 서 피켓을 들 정도로 적극 참여한 주동자로서, 이후 정부 당국의 추격을 피해 미국으로 밀항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주동자는 아니었지만 천안문 시위에 참여한 것은 맞다.

1985∼1986년 중일 슈퍼대항전에서 장 주주는 일본의 내로라하는 일류들을 5연속 날리고 '항일 영웅'이란 칭호를 받을 정도로 중국을 대표하는 기사로 떠올랐다. 당시 중국바둑계의 간판스타는 '대륙의 영웅' 녜 웨이핑 9단이었고 장 주주는 그 뒤를 이을 기대주로 자리했다.

그 정도 위상이 있는, 따라서 일거수일투족이 바둑팬들에게 영향을 미칠 국가대표 기사가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다는 자체가 중국바둑 지도부의 입장에서는 곤혹스런 일이었을 터이다. 그럼에도 정치적 소신이 확고했던 장 주주는 결코 '추위를 타지 않고' 민주와 자유에 대한 열망으로 행동에 나섰다. 그러나 소문대로 주동자는 아니었다.

 

당시 중국 국가대표팀의 지도부는 녜 웨이핑, 뤄 지엔원(羅建文), 화 이강(華以剛) 3인방이 이끌고 있었으며, 이 가운데 중국바둑의 영웅, 녜 웨이핑 9단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실력적으로도 일인자일 뿐 아니라 정계인맥 쪽으로도 그는 덩 샤오핑(鄧小平)이 가끔 불러 브리지 게임을 함께 할 정도로 뒷배가 든든한 실력자여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쥐고 있었다.

따라서 덩 샤오핑이 통치하던 시절 천안문 민주화 운동에 동참한 장 주주는 중국바둑 지도부로선 '뜨거운 감자'였다. 이런 정치적인 배경으로 장 주주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상 정치적 망명이라고나 할까. 다만 밀항이 아니라 정식 비자를 받고 출국했다.


당시 중국 국가대표팀의 지도부는 녜 웨이핑, 뤄 지엔원(羅建文), 화 이강(華以剛) 3인방이 이끌고 있었으며, 이 가운데 중국바둑의 영웅, 녜 웨이핑 9단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실력적으로도 일인자일 뿐 아니라 정계인맥 쪽으로도 그는 덩 샤오핑(鄧小平)이 가끔 불러 브리지 게임을 함께 할 정도로 뒷배가 든든한 실력자여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쥐고 있었다.

따라서 덩 샤오핑이 통치하던 시절 천안문 민주화 운동에 동참한 장 주주는 중국바둑 지도부로선 '뜨거운 감자'였다. 이런 정치적인 배경으로 장 주주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상 정치적 망명이라고나 할까. 다만 밀항이 아니라 정식 비자를 받고 출국했다.

루이 9단의 일본행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 역시 '샨사 사건'으로 중국 지도부 3인방 가운 특히 뤄 지엔원 7단에 '찍혀' 종내는 대표팀 옷을 벗게 되었으니, 동병상련(同病相憐)으로 맺어진 두 사람의 사랑은 어쩌면 전생에 이미 점지된 필연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루이가 일본에서 기사생활을 할 수 없게 된 결정적인 요인도 바로 중국바둑 지도부가 일본기원에 보낸 공문서 때문이었다. 루이 9단은 중국기원 소속 기사이므로 일본기원이 주최, 주관하는 공식기전에 참가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골자였지만, 까발려 얘기하면 정치적으로 중국기원과 문제가 있는 기사이니 일본기원이 알아서 조처하라는 메시지였다. 일본기원으로서도 중국기원과 외교적 마찰을 빚으면서까지 중국에서 온 여자기사 한명을 봐줄 이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일본여자바둑계를 단숨에 정복할 만한 위력을 가진 이 중국 여기사에 대한 경계심도 발동하고 있던 터수였다. 린 하이펑(林海峰)이나 조치훈 같은 용병 기사들에게 '반상 요코즈나'를 이미 빼앗긴 남자바둑계에 이어 여자바둑계마저 내줄 순 없는 노릇이니 때맞춰 날아온 중국기원의 협조공문은 불감청(不敢請·선뜻 요청하지는 않았으나) 고소원(固所願·내심 바라던 바) 아니던가.

실제 이 뒤 루이 9단의 일본바둑계 활동여부를 묻는 일본여류기사들의 찬반투표에서도 만장일치로 '원하지 않는다'란 결과가 나오기도 했으니 말이다.

한국여자바둑의 견인차, 루이

그러나 세상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했다. 꼭 루이 한 사람의 영향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필자는 이때의 거부권 행사가 일본여류바둑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거부'한 빈삼각 착점이었다고 본다.

이후 6년간 일본에서 아마추어 지도로 밥벌이를 하며 혹독한 야인(野人) 생활을 한 루이는 1996년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3년 뒤인 1999년 4월 한국 땅에 정착했고, 이 순간부터 세계 여류바둑계의 판도가 뒤바뀐다.

이미 남자바둑에 관한 한 10여 년째 세계바둑을 제패하며 확고한 선두 위치를 구축한 한국바둑은 '반상 유랑객'으로 떠돌던 루이-장 주주 부부를 객원기사로 받아들였다. 세계를 제패한 자신감의 발로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국여류바둑은 중국-일본보다 한수 처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을 때였으나 한국여류기사들의 패기는 일본여류기사들과는 천양지차였다. 루이 9단의 싹쓸이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

"루이 9단을 받아들이는 데 반대할 이유가 없다. 처음엔 역부족이겠지만 그런 여류정상과 자꾸 부딪쳐 봐야 실력이 는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일부러라도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하는데 호랑이가 제 발로 찾아온다 하니 오히려 좋은 기회가 아닌가." 뭐 이런 패기였다.

그리고 지금, 한국여류바둑은 일본을 확실히 따돌리고 최강 중국마저 추월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늘 가까이에 루이라는 뚜렷한 목표타가 존재하고 있었기에 스스로를 다잡으며 분발한 결과였다. 군복무차 일본에서 귀국해 이후 한국바둑을 적어도 한 점 이상 업그레이드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조훈현 9단처럼 한국여류바둑의 급성장에 견인차 역할을 한 기사가 루이 9단인 것이다.

서울 성동구 홍익동 한국기원 근처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한국 여자기사 후배들을 불러 집들이했을 때의 한 컷.

바둑이 있는 곳, 우리에겐 그곳이 천국

아무리 지옥 같은 곳이라도 바둑을 둘 수 있으면 내게는 천국이고, 아무리 천국 같은 곳이라도 바둑을 둘 수 없으면 내게는 지옥이다.

루이-장 주주 부부의 자서전 '우리 집은 어디인가?'를 읽다 이 문장 앞에서 필자는 한참동안 책을 덮어야만 했다. 지금껏, 그 어떤 바둑책을 보면서도 이보다 바둑을 사랑하는 더 절절한 대목을 만난 적이 없었다. 바닥까지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표현. 이 표현 앞에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부부가 한국에 정착하고 상당 기간이 지난 오늘까지도 왜 한국기원 근처만 고집하며 보금자리를 틀고 있는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한국기원 기사실을 출근하다시피 하는지, 바둑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장소불문하고 한달음에 달려가는지를 새삼 깨닫게 해주는 대목이다. 바둑이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천국이라는 이 말.

교황이 비행기 트랩을 내린 뒤 제일 먼저 방문국의 땅에 성스런 입맞춤을 하듯 이들 부부가 한국에 발을 딛으며 터뜨린 제일성이 "한국은 은혜의 나라"라 감읍하며 하염없이 감사해 한 이 말 역시 1%의 수사(修辭)도 섞이지 않은 것임을 절절이 느끼게 한다.

위 문장에서 '바둑'을 '사랑' 혹은 '님'으로 대체해 말하여도 이들에게는 딱 그만인 절절한 표현이리라.

루이-장 주주 부부가 "우리의 결혼은 3번기"라 표현한 것처럼, 이들의 사랑은 그토록 바둑을 사랑하면서도 둘 수 없었던 지옥의 나날처럼 사랑하면서도 만날 수 없었던 지옥 같은 기간을 거쳤기에 그만큼 극적(劇的)이었다.

중국에서 사랑의 잎을 틔운 1막은 1990년 각자 미국과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막을 내렸다.

2막은 일본과 미국에서 서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전화와 편지로 애절하게 주고받은 사연.

우리의 결혼은 3번기

둘 다 낯선 이국살이가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여자의 몸으로, 중국기원의 노골적인 방해로 공식 기사생활을 접어야 했던 루이 9단의 일본생활이 장 주주의 미국생활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힘들었다. 이때 연인 장 주주는 루이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일본생활에 낙망한 루이는 여러번 연인 장 주주가 있는 미국으로 가려고 비자를 신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 볼 수만 있다면 원이 없었다. 장 주주 쪽에서 여러 경로를 통해 초청장을 보내도 봤으나 허사였다.

 

미국 대사관이 비자를 내주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미국에 불법체류할 가능성이 많은 사람"으로 분류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캐나다, 러시아 비자까지 시도해 봤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자유국가에서 살면서 자유롭게 만날 수 없는 처지…, 로미오와 줄리엣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만날 순 없었지만, 1991년 8월 루이는 일본 후나바시 구청에서 혼자 결혼수속을 밟았다. 일본 법률은 결혼수속을 밟을 때 두 사람이 다 있지 않아도 된다는 주위 분의 조언에 따라 먼저 법적 부부로 신고했다.

루이-장주주 부부는 2002년 두 사람의 반상행마, 인생역정을 '우리 집은 어디인가'라는 제목으로 두 권의 책에 담아냈다.

그러나 중국법률은 두 사람이 다 있어야 인정했으므로 루이는 일본 법률에 따르면 기혼, 중국법률에 따르면 미혼인 상태로 1년을 지냈다.
그러다 1992년 7월 4일 장 주주가 일본에서 열리는 제2회 응씨(應氏)배에 참가차 나리타 공항에 내렸고, 이 반상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꼭 2년 만에 재회하게 된다.

그리고 나흘 뒤인 7월 8일, 두 사람은 나란히 중국대사관에 가 결혼수속을 밟았다. 루이-장 주주 부부는 이 날을 정식 결혼기념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결혼식도 없는 결혼이었다. 장 주주가 일본에 체류를 허락받은 기간은 불과 2주뿐이었고, 그나 루이도 응씨배라는 큰 세계대회를 앞둔 선수였기에 따로 결혼식을 올릴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다시 긴 이별.

장 주주가 미국 영주권을 받은 1993년 끄트머리까지 두 사람은 견우와 직녀처럼 칠월칠석을 기다리며 또 그렇게 떨어져 살아야 했다. 영주권을 받은 장 주주는 한달음에 일본으로 달려왔고 그해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다시 재회했다. 그리고 그때서야 비로소 신접살림을 차리고 1995년까지 일본에서 해로했다. 이 시기가 3막이다.

그러나 여전히 일본에서 공식 기사활동을 할 수 없었던 이들 부부는 1996년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프로바둑협회를 축으로 한 프로생활을 한다. 그러나 말이 프로지 당시의 미국 바둑수준은 동양3국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수준이어서 프로활동이라기보다는 보급활동에 치우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그랬으니….

중국을 등진 지 10여년. 10년이면 강산도 변하고 장고도 10년을 치면 제 소리를 낸다고 하거늘 그 10년 세월을, 하물며 바둑의 승부사가 승부다운 승부를 하지 못한 채 집시처럼 방랑하며 허송했으니 어찌 승부바둑에 대한 타는 목마름이 절절하지 않으리오.

"아무리 지옥 같은 곳이라도 바둑을 둘 수 있으면 내게는 천국이고, 아무리 천국 같은 곳이라도 바둑을 둘 수 없으면 내게는 지옥이다."

이들은 말한다. "바둑은 우리의 놀이이자 신성한 노동이며, 삶이자 휴식처"라고.

또 말한다. "바둑을 둘 수 있는 곳, 그곳이 우리 집이다"라고.

1999년 4월, 차민수 4단의 도움으로 한국기원 객원기사 자격을 얻어 마침내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던 바둑집시생활을 청산하고 그토록 갈망하던 공식 기사생활을 10여년 만에 다시 시작했다. 그것도 세계최강 한국무대에서.